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누구나 커터칼로 커다란 점보 지우개에 자신의 이름을 조각한 다음, 잉크를 묻혀 여기저기 찍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고자 하는 욕구는 그만큼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소유물에 대한 자신의 표식을 확실히 하고자 하는 의지는 누구나 확고하다.
세상엔 좋은 책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기어코 돈을 주고 구입해 책장에 꽂아두고 내 소유임에 바라만 봐도 든든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좋은 책, 그리고 내 소유의 책에 나만의 특별한 표시를 해두는 방법까지 더해진다면 그 책의 고유성은 한결 더 높아질 것이다.
사람들은 유사 이래 자신의 소유한 특별한 물건등에 자신만의 고유한 표식을 하면서 그것에 대한 애정의 표시나,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소유물을 보호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책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고, 단순한 소모품일 수 없는 책의 경우에는 더욱 적극적이었다.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귀한 책에 소유와 애정의 표시를 남기고자 하는 것이 모든 애서가의 욕심이었다. ‘장서표(藏書票)’는 이러한 욕구와 실용의 차원에서 생겨난 ‘책 소유의 표식’으로서 시작했지만 그 고유의 예술성 때문에 책의 역사 만큼이나 오랜기간 동안 애서가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장서표는 이러한 책의 소유를 표식하는 도장이 보다 더 예술적으로 가공되어 독립된 예술의 장르이다. 그것은 장서자의 일종의 표시이거나 책의 장식에 쓰이는데 책의 표지나 뒷면 또는 안겉장에 붙인다. 그래서 그것은 아름다움과 실용의 목적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문자와 그림이 조화롭게 결합된 것이 장서표의 중요한 예술적 특징인데 주로 ‘판화’로 제작되며 내용과 형식이 각기 특색을 갖추고 있다.
장서표에는 라틴어 ‘EXLIBRIS’라는 국제 공용의 표식이 삽입되는데 쓰는 사람에 따라 EX와 LIBRIS 사이에 '-'을 삽입한다. EX는 영어의 'from’, LIBRIS는 ‘books, library’로 ‘~애서’ ‘~장서’의 뜻이며 영어권에서는 ‘Book Plate’라고도 쓴다. 장서가 자신의 이름을 써넣는 것도 장서표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예를 들면 누구누구 장서, 애서, 소장, 책사랑 등이 그것이다.
서두가 길었다. 남궁산의 <인연을, 새기다>는 바로 판화가 남궁산 씨가 새긴 56개의 장서표(藏書票)와 그 주인인 56명 문화예술인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남궁산 씨의 예술적 감각과 표주들의 개성이 결집된 장서표를 감상하면서, '왜 아무개의 장서표는 이렇게 만들었는가' 를 설명하는 짤막한 글을 함께 읽을 수 있다. 장서표 이야기는 장서가의 직업, 취미, 세계관 등을 압축해서 표현해야 하므로 결국 '사람'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결국, 문화예술인, 그중에서도 문학가들이 많아 그들의 이야기를 귓전으로나마 듣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표주로 공지영, 김훈, 신경림, 안도현, 유홍준, 윤대녕, 은희경, 이경자, 전경린, 정호승, 조경란, 한비야 등이 등장하며, 이들 각각의 장서표 이미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장서표는 이미 단순한 소유의 표식을 넘어서 예술적으로 독립된 장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작가 남궁산은 수차례 장서표 전시를 기획했고 장서표만 모아 두 번의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각 표주마다 그 설명을 듣고 있자면, 아 그래서 이런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컨대 고양아 이미지는 어딘지 모르게 공지영의 소설들이 내뿜는 이미지들과 정말 딱 들어맞는다. 저번에 소개한 윤광준의 생활명품에서 윤광준은 몇 자락을 할애해 남궁산의 장서표를 소개했다. 그 영향인지 남궁산의 홈페이지 게시판에서는 윤광준의 서적을 읽고 장서표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남궁산 선생님의 장서표를 구할 수 있을지 문의하는 글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생활명품>을 뒤적이니 윤광준은 언제쯤 자신의 장서표를 가지게 될 지 궁금해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나도 궁금하다. 윤광준의 장서표는 어떤 이미지일지.
장서표와 장서인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 '연각재'라는 분이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계신다. 전각이다. 전각이라면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가끔씩 전각도를 가지고 몽고석이니 동강석이니 하는 석재를 다듬으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나도 장서에 대한 욕심이라면 만만치 않을 만큼 있는지라, 장서표, 장서인에 대해 상당한 매력을 느꼈다. 대충 여기저기서 가격을 알아보니 가격이 만만치 않다.
물론 기성품을 구입해 그대로 사용하거나, 조금 더 돈을 들여 내 사상과 관심사를 설명하고 작가가 그것을 나름대로 반영해 장서인을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만드는 전각표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이름이나 한자를 컴퓨터에 입력해 순식간에 제조한 장서인에 개성이 있을리 만무하다. 아무런 연도 없는 이의 단편적인 정보 몇 개만을 바탕으로 새긴 장서인에 진한 애정이 깃들어 있기란 아무래도 힘든 일이다.
미술을 전공하는 이들이라면 그 세부적인 전공 분야를 불문하고 누구나 한번쯤은 판화와 전각을 거쳐간다길래 미술을 전공하는 친구에게 뜬금없이 전각 이야기를 들이밀었다. 집안을 찾아보면 전각재료들이 남아있을 거라는 말에 그 도구와 재료들을 건네 받기로 했다.
장서표라니, 매력적인 물건이다. 나도 장서인을 만들어 내 소유의 표식을 확실히 하기로 했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새로운 매체에 눈을 뜬 것만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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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을, 새기다 - ![]() 남궁산 지음/오픈하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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